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보신 전쟁 (문단 편집) == 전쟁 전의 정치 상황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The_Emperor_Komei.jpg|width=300]] || [[파일:904px-Ii_Naosuke.jpg|width=300]] || || 막부와 대립한 [[고메이 덴노]] || [[안세이의 대옥사]]로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찍어누른 [[이이 나오스케]] || [[1853년]] [[미국]]의 [[매튜 페리(군인)|매튜 페리]] 제독이 함선을 이끌고 내항한 이른바 [[흑선내항]] 사건은 [[도쿠가와 막부]] 200년의 국시였던 쇄국양이를 외국의 군사력에 굴복하여 지키지 못했던 사건이자, 일본 제일의 무력 보유자로서 각 번을 힘으로 찍어누르던 막부의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킨 사건이었다. 더불어 막부는 [[1858년]] [[고메이 덴노]]의 칙허를 받지도 않고 독단적으로 미국과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조인.[* 정확히는 칙허를 받으려 했으나 덴노 쪽에서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무시하고 강행했다.] 덴노를 무시하고 조약도 전형적인 불평등조약이었으므로 당시 일본 각 지방 번에서 왕성하던 [[국학]][* 일본을 세계의 중심으로 보고 덴노를 수호하며 외적을 배척해야 한다는 경향을 가진 학문.]을 신봉하던 젋은 무사층의 커다란 반발을 가져오게 되었다. 실추된 막부의 권위와 무사층의 반발에 직면한 막부는 다이로(大老) [[이이 나오스케]]가 주도하여 조정과 반발무사층을 무자비하게 찍어누르는 대탄압 [[안세이의 대옥사]]를 결행, 국학파의 학자인 [[요시다 쇼인]]을 비롯 반막부 세력을 대규모로 처형한다[* 다만 막부는 쇼인을 그와 친분있던 양이지사 [[https://ko.wikipedia.org/wiki/%EC%9A%B0%EB%A9%94%EB%8B%A4_%EC%9A%B4%EB%B9%88|우메다 운빈]]의 발언을 모으기 위해 체포했는데, 쇼인이 갑자기 막부 고위 간부 [[https://ko.wikipedia.org/wiki/%EB%A7%88%EB%82%98%EB%B2%A0_%EC%95%84%ED%82%A4%EC%B9%B4%EC%93%B0|마나베 아키카쓰]] 암살 계획을 누설해서 처형당했다.]. 이에 [[미토 번]]의 탈번무사들은[* [[사쓰마 번]] 소속 무사 1명이 가담했다.] [[1860년]] 이이 나오스케를 에도성 사쿠라다문 밖에서 습격하여 참살하는 [[사쿠라다문밖의 변]]이 발생, 막부의 권위는 오히려 더더욱 추락하고, 각 번의 무사들의 증오는 더욱 커지게 되었다. 한편 [[사쓰마]], [[조슈]], [[도사]] 등의 웅번들은 흑선내항 이전부터 내부 개혁에 성공, 세수 확대와 부국 강병을 이룩하면서 막부에 대항할 군사력을 갖추었으며, 각 번의 요직을 젊은 하급 사무라이들이 차지하는 일이 많았다. 점차 이들은 일본 전국에 있던 존왕양이지사들의 산실이 된다. 사쿠라다문 사건 이후 막부의 중심에 있던 로주(老中) [[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B%8F%84_%EB%85%B8%EB%B6%80%EB%A7%88%EC%82%AC|안도 노부마사]]는 [[https://ko.wikipedia.org/wiki/%EA%B5%AC%EC%A0%9C_%ED%9E%88%EB%A1%9C%EC%B9%98%EC%B9%B4|쿠제 히로치카]]와 함께 지나친 강경책이 피를 불렀다고 보고 조정과의 화해를 도모한다. 반 막부세력의 정신적지주인 조정과 정권을 나눠 함께 정치를 수행하고자 하는 이 시도를 공무합체운동(公武合體運動)이라고 한다. 이것을 위해 [[고메이 덴노]]의 이복 여동생인 [[가즈노미야 지카코 내친왕]]을 장군 [[도쿠가와 이에모치]]의 부인으로 맞이하는 정략결혼을 추진하지만 존왕양이파의 큰 비난을 받고 안도 노부마사는 에도성 밖에서 습격을 받아 부상을 입고 책임론을 제기받아 몰락하게 된다. 막부의 권위가 연일 실추되는 시점에서 사쓰마 번의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7%88%EC%A6%88_%ED%9E%88%EC%82%AC%EB%AF%B8%EC%93%B0|시마즈 히사미쓰]]가 [[1862년]] [[4월]] 군대를 이끌고 상경하여 과격한 존왕파들의 준동을 막고 양자를 중재하고자 나선다. 이 과정에서 교토 데라다야(寺田屋)에 머물던 과격파 지사를 참살하는 데라다야 사건을 일으키고 칙사를 대동, 막부에 압력을 가한다. 이에 막부도 사쓰마의 의견을 받아들여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후견에 임명하고 교토 수호직을 신절하여 [[아이즈 번]]의 [[마츠다이라 카타모리]]를 임명하게 된다. 그러나 [[조슈 번]]은 사쓰마의 정국 주도에 반발, 조정 측 인사들을 움직여 1862년 10월 통상조약을 파기하고 양이를 명하는 칙허를 막부에 전하고, 막부는 각 번에 양이령을 내린다. 조슈가 정국을 주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사쓰마 번]]과 [[아이즈 번]]은 연합하여 [[1863년]] [[8월 18일]] [[쿠데타]]를 결행, 조정 내 양이파 쿠게 7명과 조슈 세력을 모조리 추방하고[* 사실 8월 18일의 정변을 일으킨 진짜 흑막은 당시 덴노인 [[고메이 덴노]]였다. 양이론자였지만 덴노 자신은 좌막론자. 애당초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나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했었다. 하지만 쿠게들은 자신들과 같은 양이론자라는 것만 보고 좌막론자인 것은 보지 못했다. 그래서 덴노가 직접 영국, 미국과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반발한 덴노는 같은 좌막론자인 [[구니노미야 아사히코 친왕]]을 시켜 8월 18일 정변을 일으킨 것.], 1864년 이케다야에서 쿠데타를 모의하던 조슈 유신지사들을 [[신센구미]]를 동원하여 참살, 마침내 [[이케다야 사건]]으로 자극받은 조슈 번은 군대를 이끌고 상경, 전쟁을 벌이나 사쓰마-아이즈 연합군에 의해 단 하루 만에 참패한다. 이것이 [[금문의 변]]이다. 결국 책임을 지고 조슈 번 가로 [[https://ja.wikipedia.org/wiki/%E5%91%A8%E5%B8%83%E6%94%BF%E4%B9%8B%E5%8A%A9|스후 마사노스케]]가 할복했으나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조슈 정벌|다시 구니시 시나노 등 3명의 가로가 추가로 할복할 것을 요구해 이를 관철해낸다.]] 사쓰마와 막부군은 조슈로 진격, 마침 조슈의 양이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시모노세키 전쟁|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함대가 시모노세키에 설치된 조슈 번의 해안포대들을 공격, 완파하고 지상군까지 상륙시키는 완승]]을 거두어 조슈 번은 보수파가 집권하게 되고 유신지사들을 감옥에 가두고 항복을 선언한다. 그러나 [[타카스기 신사쿠]] 이하 유신지사들이 기병대(奇兵隊)[* 말타는 기(騎)병이 아니라, 당시 일본의 정서를 혁파하고 농민들, 상인들까지 입대를 가능케 한 혁신적인 군대였다. 이들은 무진전쟁 이후 일본군의 기반이 된다.]를 동원하여 내전을 거쳐 다시 조슈 번의 정권을 잡았고, 막부가 잘되기를 바라지 않는 사쓰마는 조슈에 군사적/금전적 지원을 하고 있었다.[* [[대정봉환]] 문서에서 써 있듯이 처음에는 공무합체를 지지하며 막부를 지원했으나 에도막부 중심 공무합체파의 탄압을 받고 조슈가 무너지면 막부의 다음 타겟이 본인들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서 라이벌인 조슈를 지원했다.] [[사카모토 료마]]의 중재로 [[1866년]] [[1월 21일]] [[삿쵸 동맹]]이 이루어진 후 막부는 제2차 조슈정벌을 통해 강경파가 다시 득세한 조슈 번을 재정벌하려고 하였으나 사쓰마는 참전을 거부, 진격한 막부군은 근대화한 조슈 번에 의해 참패를 거듭하고, 내적으로는 쌀값상승에 의한 [[잇키]] 등의 악재가 겹쳤다. [[도쿠가와 이에모치]]마저 병으로 사망하여 막부군은 실패하고 퇴각, 이로써 막부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후견인에서 장군으로 즉위한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이 점을 노려 [[프랑스군]]에서 고문단을 초빙하여 프랑스식으로 근대화를 개시하고, 전근대적인 행정체제를 개편하여 육군/해군/외교/회계/국무로 나누어 근대적인 중앙집권형 시스템을 도입했다. 더불어 1867년 마침내 사쓰마와 조슈가 무력으로 막부를 쓰러트릴 것을 결의하자, 정권을 덴노에게 반납하는 [[대정봉환]]을 실시,[* 이와 동시에 막부는 자동적으로 소멸. 이후 막부 측을 호칭할 때에는 구 막부라고 부르게 된다.] 명분을 주지 않음과 동시에 현실행정에 경력이 전무한 조정 측이 견디지 못하고 막부 측에 행정대행을 맡기게 되고, 공무합체하에서 각 번들이 참여하는 의회의 수장 격을 맡으면서 실질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막부는 멸망했을지언정 400만석이 넘는 대다이묘인 도쿠가와의 세력은 온전했다. 그러나 사쓰마는 게이오 3년 12월 9일(1868년 1월 3일) 신정부 수립일에 무력으로 쿠데타를 결행, 교토 황궁을 점거하고 [[왕정복고]]를 관철한다. 신정부는 당일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내대신 직위와 영지의 반납을 결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